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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08 - 상대주의에 대한 소고 1카테고리 없음 2021. 8. 5. 20:11
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신봉했던 모더니즘은 너무나도 이성적이었던 나치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. 이후, 필연적으로 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득세하게 되었다. 포스트모더니즘이 득세하고 50년 남짓이 지난 지금, 어쩐지 그 끝이 보일 것 같아 흥미진진한 요즘이다.
포스트모더니즘은 ‘해체주의’-의심과 물음의 제기-로 대표되며, 모더니즘을 해체해 가는 과정에서 다양성과 상대주의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. 하지만 모든것을 존중한다(해야한다)고 말하는 상대주의는, 오직 하나만을 존중하는 절대주의의 존재로 인해 반드시 스스로 모순될 수 밖에 없다. 상대주의는 절대주의를 긍정할 수 없다는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.
이전에도 적었던 내용이지만, 나는 고전적인-고리타분한- 인간이다. 감성보단 이성으로 생각하고자 하며, 다양성보다는 보편성을 좋아한다. 당연히 존중하지 못하는 것들도 더러 있다. 젠더가 그렇다. ‘제 3의 성’의 존재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. ‘젠더론’은 그 확장성에 문제가 있다. 당장 내가 ‘컴퓨터에게서 성욕을 느낀다’ 고 주장했을 때, 젠더론자들은 이를 존중할 수 밖에 없다. ‘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에’ 의심할 수 없어서이다. ‘상대주의’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낳은 산물이지만, 동시에 의심과 해체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더이상은 아니게 되었다.
‘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들’이 보이는 이중적인 태도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. ‘모든것을 존중하는 것’은 그저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다. 우리는 ‘존중할 수 있는 것’ 만을 존중할 수 있다.
내가 ‘절대성’이 아닌 ‘보편성’ 을 좋아하는 것은, 보편성이 젠더론 안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. 트렌스젠더가 그렇다. 이분된 성이 실제 성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경험해보진 않았지만, 기존의 두 개의 性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충분히 상상할 수는 있는 부분이다. 트렌스젠더는, 내가(가장 평험한 우리가) 상상할 수 있는 보편의 범위에 이미 들어와 있으므로, 그들을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. 나의 생각에 잘못이 없다면, 앞으로의 이념 갈등에는 이 '보편성'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질 것이다.